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내전 (문단 편집) ==== 공화파에 대한 지원 ==== 공화파 정부는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소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중립정책을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심지어 돈 주고 사겠다는 무기조차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며 판매를 거부해 버렸다.[* 사실 내전 중인 진영에 돈 준다고 무기 파는 짓은 돈에 눈이 멀어서 내전이 격화되거나 말거나 무기 장사질하는 양심 없는 짓거리로 인식되는 것이 정상적이며 신해혁명 이후 오랫동안 내전 상태였던 중국 상대로는 이미 1910년대부터 미국의 주도로 무기 금수조치가 이루어져서 생각보다 그런대로 금수조치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주요 열강 중에서 소련을 제외한다면 일본 제국(?)이 주퇴복좌기도 없는 구형 야포인 31년식 속사포를 내 준 적이 있긴 하다. 중견국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가 자국에서 노후화되어가고 있던 르노 [[FT-17]] 전차 중고품 등을 판매해 줬으며[* 폴란드가 피우수트스키 정권 수립 이후 반공주의에 기반한 반소 우익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 하에 있었고 독일과 [[불가침조약]]까지 맺은 상태였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폴란드의 이웃나라인 [[체코슬로바키아]]와 북유럽 국가 [[핀란드]] 역시 [[Vz.26]] 경기관총과 [[KP/-31]] 기관단총 등 자국산 총기들을 프랑코의 국민파와 내전 중이던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군에게 판매했다.[* 나중에 프랑코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쟁취하자, 프랑코 정권은 이 공화국 정부군이 운용하였던 vz.26 경기관총들을 베이스로 1950년대까지 푸실 아메트랄라도 오비에도(Fusil ametrallador Oviedo)라는 Vz.26의 복사본 경기관총을 생산, 운용하기도 했다.] [[레옹 블룸]] 총재 아래 같은 연립 좌파 정권을 이루고 있었던 프랑스는 내전 초기까지만 해도 공화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물자도 보내 줬으나 영국 보수당 내각의 적극적인 반대와 자국 내의 극심한 좌우 갈등 때문에[*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알베르 르브룅]]이 적극적으로 블룸 내각의 공화파 지원에 훼방을 놨다. 그리고 내각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는데 공군장관 [[https://en.wikipedia.org/wiki/Pierre_Cot|피에르 코트]]는 공화파 지원에 동의했으나 국방장관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반대했다. 그리고 프랑스 인민전선 내 급진파 장관들도 블룸이 영국의 지지를 받는 전제 하에 지원에 동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결국 공화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만다.] '스페인 내전이 프랑스 내전으로 이어진다'는 불안으로 결국 지원을 끊고 중립 태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레옹 블룸 내각은 적어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국민파를 지원하는 것만이라도 막으려고 영-불-독-이-미국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사태 비간섭 위원회라는 국제기구를 만들었다.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딴 거 무시하고 계속 지원을 해 줬고 영국의 보수당 정권이 이를 암묵적으로 방관하여 결국 국제적 비간섭 정책은 국민파에게 유리했다. 영국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스탠리 볼드윈]] 총리의 집권 [[영국 보수당|보수당]]이 파시즘보다 공산주의를 더 경계했으므로 공화국을 돕기는커녕 프랑코를 유배지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태워간 비행기를 제공해 주는 등 되려 은근히 국민파를 도왔다. 지브롤터 주둔군 사령관은 국민군이 이탈리아나 독일과 교신할 수 있도록 통신기까지 빌려주었다.[* 영국은 [[러시아 내전]] 당시 [[윈스턴 처칠]]의 주도로 레닌 정권에 맞서 백군을 지원했을 정도로 공산주의를 경계하던 국가였다. 이러니 사실상 국민파 진영에 베팅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프랑코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만 비공식적인 의용군을 파병하는 선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에 대항한 직접적인 참전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인 얘기긴 하지만 프랑코 역시 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식적으로는 끝까지 중립을 지킴으로써 영국의 이러한 태도는 적어도 영국에겐 패가망신 수준의 비참한 결과를 유발하지는 않았다.] 미국도 이때만 해도 [[먼로주의|고립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여론 자체는 공화정부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앤터니 비버에 따르면 70%가 공화진영 지지, 20%가 국민진영 지지였다.] 미국 가톨릭계가 국민파를 지지함에 따라 가톨릭 표를 잃을까 봐 우려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금수조치를 유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결론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으며 결국 [[1937년]]에는 교전 중인 어떤 국가에게도 무기를 판매하지 못한다는 중립법을 통과시켰다. 이 와중에도 [[헨리 포드]] 등의 기업가들은 프랑코에게 거리낌 없이 헌금을 보냈고 [[https://en.wikipedia.org/wiki/Texaco|텍스코]] 같은 석유 재벌들은 돈을 받지 않고 석유를 외상으로 보내 줬다.[* 당시 텍스코 CEO였던 [[https://en.wikipedia.org/wiki/Torkild_Rieber|토르킬 리베르]]가 친나치, 친파시즘 인사였던 점도 한몫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건너가 [[국제여단]]에 투신한 사람들도 꽤 있었고, 이들은 전후 [[매카시즘]] 시절이 되자 반미국적행위 위원회에 한 번씩 붙들려 갔다.[* 1938년 말이 되어서야 루스벨트 행정부는 공화파를 돕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공화파 지지자였던 영부인 [[엘리너 루즈벨트]] 여사 역시 남편을 설득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고. 프랑코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전선에는 사단 단위 병력을 의용군으로 파병해 사실상 참전하되 서방 연합국에 대해서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본전은 건진다만.] 단 루스벨트와 일부 집권 민주당 인사들은 공화국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불법적으로 일부 지원을 해주기는 했다. 특히 나치 독일을 경계한 루스벨트는 프랑코의 승리가 라틴아메리카에 친독 파시즘이 퍼지는 것을 초래할까봐 두려워했다.[* 실제로 라틴아메리카 일부 지역에 팔랑헤 조직이 있었고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미국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대부분의 군사원조는 소련이 제공했다. 대량의 소련산 군장비, 석유를 포함한 물자 및 전투요원, [[군사 고문단]]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는 무상지원이 아니어서 이들을 보내주는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은 당시 세계 4위의 금 보유국이었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괴]](700톤, 당시 가치로 약 '''3억 5,000만''' 달러)[* 이마저도 답이 없는 것이 금을 무기 대금인 [[소련 루블|루블]]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환율을 소련에게 유리하게 책정해 환차익을 챙겼다. 게다가 내전 초반에 제공한 무기들은 소련의 조병창들에서 생산된 최신 무기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 시절에나 쓰던 구식 무기들이나 러일전쟁과 [[러시아 내전]] 당시 일본군이 운용하거나 백군에게 지원된 물자를 노획한 것들이 허다하였다. 일본제 볼트액션 소총이나 19세기에 제작된 태엽식 기관총 같은 희귀한 무기들이 스페인 내전 당시 사용된 이유이기도 했다. 소련 측은 무기고에서 먼지만 쌓여 가는 러시아 제국과 러일전쟁, 러시아 내전 당시 획득하거나 과거 운용했던 구식 무기들을 다 소진하고 나서야 [[PPD]] 기관단총이나 [[DP28]] 경기관총 같은 소련제 최신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를 그 대가로 받았다. 그리고 전세가 기울어지고 공화파가 가진 금괴가 떨어지자 스탈린은 지원을 끊었다. 그나마 한 지원이 있다면 스페인 공화파들의 부모 잃은 자식들을 소련에 데려가서 먹여주고 재워준 정도.[* 이후 [[독소전쟁]]이 터지자 이 스페인 [[고아]]들은 소련인 고아원 직원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재빨리 참호를 파고 엄폐해서 소련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들과 같이 소련으로 망명한 공화파 파일럿 등의 스페인 난민들은 소련 내부의 복잡한 파벌 갈등에 휘말려 [[대숙청]] 당시 중앙아시아 [[굴라크]]에서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이것이 중앙아시아의 공동묘지들에서 스페인계 이름을 가진 묘비가 종종 발견되는 이유다.] 게다가 위에 서술한 지원을 대가로 한 공화국 내부의 정치적 농간질도 심각하게 부려서 도와준 만큼 해악도 심각하게 끼쳤다. 당시 소련은 스페인 내전을 국제 파시즘 세력의 소련을 겨냥한 세계대전의 전조로 해석했고, 소련 내부에서 스페인 내전을 재현하기 위한 반혁명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편집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소련의 국가안정성을 제고하는데 급급했지 후하게 스페인에게 퍼 줄 처지가 아니었다. [[니콜라이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장으로 [[대숙청]]을 지휘하여 모스크바 재판이라는 처형쑈를 연출하던 것이 이 시점이었고 적어도 1938년 겨울에 [[라브렌티 베리야]]로 내무인민위원장이 교체되기 전까지 스탈린은 내부청소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이 되면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 [[뮌헨 협정|체코슬로바키아를 먹고]] [[폴란드 침공|폴란드를 회치기 직전]]이었으므로 역시나 스페인 따위를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으며 이미 1937년에 발생한 중일전쟁으로 독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소련 침공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고 소련 침공할 일이 없는 프랑코 따위보다야 일본 견제를 위해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지원을 더 해 줘야 했다.[* [[중소관계]]는 1차 국공내전 발발 이후 국민정부가 소련을 폭동 배후로 지목하여 단교를 선언함으로 단절되었고, [[봉소전쟁]]까지 터지면서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만주사변]] 이후 일본을 견제할 것은 소련 밖에 없다는 판단 하에 다시 밀월관계로 접어들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중소 군사동맹은 중일전쟁 이전부터 계속 논의되어 왔고 일본 육군은 스탈린과 장제스가 연합하여 만주를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대단한 불안감에 휩싸였고 이것이 결국 [[루거우차오 사건]] 당시 일본군이 폭주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어쨌거나 스탈린은 장제스에게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면 당연히 소련이 만주에서 일본을 견제해줄 것이라고 립서비스는 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나 일본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화민국]]이 일본에게 굴복하게 되면 블라디보스토크 등의 극동 영토에 가해지는 압박이 거세질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스탈린 역시도 [[중국공산당]]을 합법 정당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선에서 국민정부에 대한 대대적 원조를 제공하였다. 소련은 실제로 많은 양의 무기와 차량,전투 파일럿들을 중화민국 측에 제공했고, 아예 스페인 공화파 측에는 내민 적도 없는 막대한 차관까지 제공함으로서 스페인 내전보다는 중일전쟁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낙후되었던 소련이 [[전간기]] 시점에는 이미 스탈린의 급진적인 공업화 노력으로 군수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수출할 수 있는 국가로 거듭난 건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전쟁에 둘 다 관여한다면 자연스럽게 역량이 분산될 수밖엔 없었다. 중일전쟁의 폭발은 공화파 측에는 추가로 더 나쁜 영향력을 끼쳤는데 구미 사회 언론의 관심이 스페인 내전보다는 새로 터진 중일전쟁 취재에 더 쏠리면서[* 스페인 내전으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 해밍웨이 모두 중국에도 갔다. 중일전쟁의 주역인 국민정부가 국공내전에서 망하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전까지 받던 온정적 관심조차 점차 희미해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외부적, 도의적 관점은 일단 재껴 놓고 보면 소련 입장에서 스페인은 어쨋든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조국'''으로서 대놓고 방관할순 없는데, 막상 현지 정치판엔 비코민테른 계열 [[좌파공산주의|독립 공산주의자]],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 공산당]]을 통해 '사회적 파시스트'라 실컷 욕하던 '개량주의' 사회민주주의자, 러시아 혁명 초기부터 서로 사이좋게 폭탄 주고받던 [[아나키스트]]들이 득실거리던 막상 급한 불만 꺼지면 돌아설 게 뻔한 (코민테른의 관점에선) '이단'들이 장악할 가능성이 높은 전형적인 [[계륵]]이었다. 심지어 지리적으로도 어디 대충 소련 자체에서 낡은 물자, 예비 부대 몇개 파견하기 쉬운 가까운 나라도 아니다. 물론 이 시점에도 반혁명 5열이 산재해있다는 편집증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는 것은 별개의 얘기다. 거기에 더해 소련은 사실 [[러시아 혁명]] 때도 우크라이나에서 [[네스토르 마흐노]]의 [[아나키스트]]들과도 교전했던 적이 있었다.[* 혁명 초에는 사이좋게 의회민주주의 임시정부를 타도하는 사이기는 했다. 실제로 아나키스트 중 일부 개인은 여전히 볼셰비키에서 전쟁영웅 대접을 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연대의 필요가 사라진 후에는 서로가 적으로 돌변했다.] 내전 초 아나키스트의 정치적 본거지인 바르셀로나로 파견된 어느 코민테른 요원은 눈치없이 아나키스트들을 상찬했다가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숙청되기도 했다. 공화진영에 파견된 소련 고문, 요원들은 대외적으로는 공화파 내 제5열 숙청에 열을 올렸고 온화한 스페인 땅[* 예를 들어 스페인을 포함한 라틴 문화권에는 식사 중 와인을 곁들이는 습관이 있었는데 소련인들이 이런 관습을 접하면서 근무 중 합법적으로 알콜에 취할 수 있었다.]에서 편히 지내면서 나름 꿀을 빨았지만 사실 이들조차도 [[대숙청]]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니, 뭐 사실 자유롭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당시 주스페인 소련 대사이자 소련의 군사 지원 밑 국제여단 모집, 인민전선 내 비공산당 좌파 숙청을 주도한 볼셰비키 원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부터 시작해서 많은 NKVD, 붉은 군대 간부들이 스페인에선 다른 비공산주의 좌파를 숙청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본국 송환되더니 본인들도 영문도 모르게 사형 or 굴라크행이 되어 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기구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은 비단 소련인 참전용사 본인들뿐만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간 공산당계 국제여단원, 스페인 망명객들도 상당수는 마찬가지로 해당됐다.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몇 달 되지도 않아 갑작스럽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어제만 해도 아주 열심히 외쳐대던 반파시스트 선전도 한동안 안 하게 되고 소련이 지금까지 스페인 공화국에게 퍼주었던 지원도 갑작스럽게 정치적 부담요소로 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독소 불가침조약]]이 스페인이 초반에 2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안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훗날 틀어지지만 자기네 주요 물주가 그토록 욕하던 빨갱이와 손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우여곡절에서 무탈하게 소련으로 복귀한 스페인 내전 경험자들은 훗날 [[할힌골 전투]]와 [[대조국전쟁]]에서 남들보다 일찍 경험한 현대 총력전의 경험을 보여주면서 전차, 전투기 에이스로 활약했다.[* 할힌골 전투 항공전에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소련 공군 파일럿들의 기여가 컸다.] 이 외에도 이런 스페인계 고급인력들은 [[냉전]] 시대에 소련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외교전략에 요긴하게 쓰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짜 '순수한' 의미로 이데올로기적 동지들을 돕자는 의도로 원조를 보낸 나라는 [[멕시코 혁명]]을 겪고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필두로 한 전직 혁명가들이 집권했던 [[멕시코]]밖에 없었다. 반란 발발 직후에 멕시코가 보내준 소총 2만 정과 탄약은 정말 모든 게 부족하던 시기에 도착해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중립주의를 강경하게 밀어붙인 미국의 압력과 방해 공작, 그리고 멕시코 자체의 거리와 열강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한 지원 능력 때문에 판을 엎을 만큼의 힘은 못 되었다. 그래도 멕시코는 소련처럼 장사를 하려고 들지도 않았고 내란이 끝난 뒤에 피난처도 제공해 주었다. 공화파 출신 난민들을 대거 받아 주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정착할 길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주었으며 망명 세대로 대표되는 스페인 문화와 예술이 나머지 서방세계로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결국 [[1939년]]에 득의양양해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을 터뜨리기 직전에야 루스벨트와 처칠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공화국을 도왔어야 했다고 이전에 보였던 두 국가의 행적을 후회하는 발언을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며 결국 이 두 국가는 그 파시스트 세력들을 직접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으로 이전에 공화국을 돕지 않은 대가를 치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은 4월 1일에 프랑코에게 항복했고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9월 1일에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유럽]]과 미국이 스페인을 그냥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부 차원의 참가는 없었지만 개인 차원의 의용병은 다수였고 이들은 [[국제여단]]을 결성하여 국민군에 맞서 싸웠다. 국제여단군의 구성은 대부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좌파나 유대인, 미국의 경우 흑인 등이 포함된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이이나 단순히 스릴을 찾는 모험주의적인 동기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자국이 이미 파시스트들이나 우익 독재정에 넘어간 사람들은 스페인을 자국에서 싸우던 파시즘과의 전쟁의 연속으로 보았고 스페인마저 넘어가면 진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치열한 투지와 사기를 보여주었다. * 공화파 정부에 대한 국가별 지원병 수(약간 오차는 있을 듯) * [[프랑스 제3공화국]]: 9,000명 * [[나치 독일]]+[[오스트리아 연방국]]: 5,000명 * [[이탈리아 왕국]]: 3,350명 * [[미국]]: 2,800명. 사망자 750여명.[* 링컨 국제 여단을 보냈다.] * [[영국]]: 2,000명 * [[폴란드 제2공화국]]: 3,113명 * [[캐나다]]: 1,400명 * [[소련]]: 3,000명[* 이는 연인원으로, 특정 시점의 인원이 800명을 넘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 [[헝가리 왕국]]: 1,000명 * 발칸 반도 지역 국가: 2,095명 * [[노르웨이]]: 225명 * [[덴마크]]: 500명 * [[스웨덴]]: 500명 * [[벨기에]]: 1,700명 * [[기타]]: 5,000명 위 수치는 공화파 정부에 의해 정식적으로 집계된 공화파 정부 휘하에서 싸운 국제 여단원들만 친 것이고 공화파 측에서 싸우되 공화파 정부 휘하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지휘 체계를 형성하여 싸운 POUM, CNT 등의 무장 노조 소속으로 싸운 아나키스트, 트로츠키주의자, 비 소련 계열 사회주의 의용군 또한 대략 5,000명 전후 쯤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독립 노동당 소속 의용군으로 POUM 소속으로 싸웠던 [[조지 오웰]]과 아나키스트 CNT 산하 국제 의용병 부대였던 세바스티엥 퓌레 부대에 속했던 시몬 베이유. 안그래도 격렬했던 20세기 초중반의 복판에 자원해서 뛰어들어간 사람들이니 국제 여단은 종전 이후에도 전 세계 좌익 운동 사이에서 일종의 역사적 성역으로 찬양받았는데 뒷 배경이 이렇게 파란만장하니 그 운명도 기구했고 이런저런 의미 있는 일화도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 출신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의 지휘관은 하라마 전투에서 전사한 뉴욕 출신의 흑인이었던 올리버 로였는데 이 사람은 정식 미군의 역사는 아니지만 독립 국가 형성 이후 미국의 전쟁사상 최초로 유색인종이 백인 부대를 지휘한 경우로 역사에 남았다. 훗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독재자가 되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빨치산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이쪽은 사실 악명에 가까운 경우지만 [[슈타지]]의 수장이었던 에리히 밀케를 포함한 2차 대전 이후 [[동독]]의 국가 지도자 다수 등 냉전 초기 [[동구권]]의 지도자들이 본격 국제 좌파의 간판들로 명성을 쌓은 무대도 국제 여단이었다. 특히 독일 출신의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른스트 텔만 대대는 훗날 나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일종의 건국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던 동독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 독일의 역사적 원류'로 격상되어 대접받았다. 폴란드에서도 국제 여단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제2차 세계 대전 [[독소 폴란드 점령|독일의 폴란드 점령기]]에 대독 투쟁에 나섰고[* 특히 돔브로프스키 대대원(Dąbrowszczacy)들은 위의 마드리드 방어전에도 참여한 역전의 용사들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산주의 성향의 반독 빨치산인 인민군(Armia Ludowa)과 역시 공산주의 성향의 폴란드 인민군(Ludowe Wojsko Polskie)에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이후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의해 영웅시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위에서 보여주듯이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에 대한 대접과 처우는 대전기 이후 냉전 시대의 지정학적 논리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단 포츠담, 얄타 회담 이후 스탈린의 나와바리로 떨어져서 막상 현지 인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공산 정권이 소련군과 함께 '설립 당한' 동구권 국가에선 그나마 같은 공산주의자들끼리 때려죽이는게 허다했던 스탈린 시대 이후에는 정권 원로이자 혁명의 선구자로 존경받았으나 동구권 몰락 이후에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지에선 소련과 관련된 과거사 전반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도 '적폐'로 분류당해 공산정권 시절 세워진 이들과 관련된 기념비 등이 철거 논란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전후 [[반공주의]]가 강하게 자리잡은 영미권 출신 스페인 내전 참전자들은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막상 2차대전 중에는 OSS, MI5 같은 정보기관원들도 이들의 경험과 연줄을 높게 사 한동안 특수 작전에 중용하기도 했지만 장교 진급은 일괄적으로 막으려고 했고 특히 미국의 경우 전후 [[매카시즘]]으로 인하여 취업, 주택, 여권 발급 등 각종 공민권에서 제약을 받는 등 적잖은 핍박을 겪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인 국제여단원들은 전후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쿠바 혁명|혁명]] 이후 [[쿠바]] 정권에 대한 봉쇄 반대, [[로널드 레이건]] 정권 시기 [[산디니스타]]에 대한 지원 등 미국 사회 내 굵직한 반체제 시민운동 등에 뛰어들면서 그나마 냉전 시기 반공주의도 한풀 누그러진 시절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들은 사회운동계 원로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나마 전후 냉전 시기에 진영 자체로는 서방권으로 들어갔지만 국내 정치에선 항상 좌익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무엇보다 스페인 내전 자체와 대전기 레지스탕스 활동 와중 '''스페인 공화파에게 빚을 지게 된''' 프랑스, 이탈리아에선 스페인 참전장병들에 대한 공식적, 준공식적 대우나 사회적 입지나 성공적으로 정착한 편에 속한다. 아일랜드인 참가자가 300명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아무래도 지리적+언어적 편의성 때문에 영어 화자들이 중심인 제11국제여단 영국인 대대에 편성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십몇 년 전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IRA]] 소속으로 싸웠던 베테랑 혁명가들이 당시 반대편 영국군의 대민 공포 전략으로 악명 높았던 Blacks and Tans 특수부대 출신자들을 만나 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저런 천하의 원수들과 손잡으라고!?" 라며 노발대발했던[* 역시 켄 로치 작품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 원한이 가시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부대원들의 반발로 인해 아일랜드인들은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지도자 중 하나이자 아일랜드 사회주의의 시조부쯤 되는 인물인 제임스 코놀리의 이름을 딴 코놀리 전열(Connolly Column)이란 미국계 링컨 대대 소속 독립 부대로 재편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